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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독 귀에 익은 듯한 노래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지난 1980년대 내내 이 노래는 우리 학생들의 가슴을 슬프고도 아련하게 했으며, 전남대 도서관 앞 5·18광장의 푸른 잔디밭에 누워 학생들은 곧잘 이 노래를 때로는 중얼거리듯이, 또 때로는 두 주먹을 불끈 치켜들고서 부르곤 했다. 우리는 이 노래를 ,'5월의 노래'라고 불렀다. 이 노래는 그 사연 또한 가사만큼이나 아련하다. 그것은 프랑스의 샹송가수 미셸 뽈라레프의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란 샹송을 편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가 언제 편곡했으며, 가사 또한 누가 언제 붙인 것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월의 노래'는 그 이후 이른바 민중가요의 효시가 된 노래의 하나였으며, 지난 1980년대 내내 5·18광주민중항쟁의 실패와 좌절을 가슴이 저미도록 애달파하는 전남대 학생들의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남대 정문 바로 그 오른 편에는 자그마한 놀이터가 다듬어져 있고, 거기 한 켠에 맷돌처럼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진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다. 그 바위 가운데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모습의 청동으로 된 조각품이 붙어있으며, 그 곁에 '5·18민중항쟁 사적 1-전남대학교 정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광주민중항쟁이 최초에 발발하던 모습의 일단을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이곳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5·18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이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면학에 몰두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면서 항쟁의 불씨는 뿌려졌다. 이어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시위를 벌였다.계엄군은 항쟁 기간 중 시내에서 끌고 온 시민들을 여기 종합 운동장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하고, 그들을 집단 구타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주검은 학교 안에 암매장되었다가 그 후 발굴되었다. 당시 정문 앞에는 용봉천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 감금했던 이학부 건물은 철거되었으며 교문 또한 새롭게 모양이 바뀌었다. 지금 우리는 용봉천을 가로질러 다리를 건너서 대학으로 들어오던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울 만큼 변해버린 정문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정문에서부터 5·18광주항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정문을 들어오면 왼편, 법대로 향하는 언덕을 따라 길이 다듬어져 있으며, 그 중간쯤 오른편에는 당시의 총학생회장으로서 후에 감옥에서 끝내 생명을 끊어야 했던 박관현을 기리는 ‘박관현 열사 혁명정신 계승비’가 나타난다. 지금 우리 전남대 앞에는 5·18광주항쟁이 남긴 그런 정도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5월 17일 저녁은 불길한 예감으로 무척 어수선한 시간들이었다. 전국에 걸쳐 비상 계엄령이 확대되고, 서울에서는 합수부의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자행되면서, 전남대의 이른바 ‘문제학생’과 ‘문제교수’들에 대한 예비검속과 동시에 전남대 교정을 군인들이 진주하여 점거하였다. 이 흉흉한 상태에서 날이 밝았고, 1980년 5월 18일, 그 길고 긴 하루는 온통 탄식과 신음으로 얼룩졌었다.
역사의 거대한 음모가 전남대와 광주의 하늘과 땅을 뒤흔들며 피 냄새를 뿌렸다. (전남대의 정문은 5·18광주민중항쟁에 있어서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5·18광주민중항쟁은 바로 전남대의 정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따라서 그곳은 실질적으로 민중항쟁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 날 오전 9시경, 도서관을 찾기 위해, 혹은 '휴교령이 있으면 오전 10시 학교에 집결하자.'라는 총학생회 측의 당부를 좇아 등교한 학생들은 교문을막아선 계엄군인 공수부대원들과 용봉천 위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의 첫 격돌의 상황에 대해 당시 한 학생의 증언을 들어보자. "학생 수가 불어나고 일부 투석이 시작되자 두 번째 경고 방송이 나왔다. 이미 교문은 굳게 닫히고 교문 앞에는 20명가량의 공수부대원들이 지그재그로 도열해 있었다. 갑자기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최루탄이 터지면서 교문 앞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돌맹이가 날아갔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공수부대원들의 상상을 초월한 무차별적이고 반이성적인 폭력이 휘돌려지면서, 항쟁은 이제 광주 시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8일 오후 들어, 군인들의 잔인한 폭력을 목격한 시민들이 학생들을 대신하여 시위의 전면에 나서면서 19일부터는 군인들이 발포를 하게 되었고 그에 대해서 시민들은 소극적이나마 무력을 동반한 대항폭력을 자행하게 되었다. 1980년대 내내 학생들의 시위에 사용되는 소주병으로 만들어진 화염병이란 무기가 등장한 것도 아마 이 때였을 것이다. 20일 오후, 10일 간의 광주항쟁사에서 최대의 시민봉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엄한 차량 시위가 벌어졌다. 시민들의 공수부대에 대한 대항은 곧 버스나 택시 기사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무등경기장에 집결해 있던 차량들에 의한 시위로 나타났다. 항쟁 나흘째인 1980년 5월 21일은 사월 초파일, 곧 석가 탄신일이었다. 이날 정오, 금남로는 무장 군인들의 시위 군중들을 향한 집단 발포로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그것을 ‘피의 수요일’이라고 부른다. 그날 오후부터는 적극적인 무장투쟁만이 군인들의 집단발포에 대항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일명 '시민군'이라고 부르는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곧이어 공수부대와 시민군들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탈취한 탱크와 버스, 그리고 트럭들로 무장한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집단발포에 따라 주검을 딛고 넘어 계엄군의 그 최후 저지선을 무너뜨리면서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몰아내고 도청을 접수하게 되었다. 시민군의 적극적인 대항폭력에 따른 계엄군의 퇴각 이후, 시민군들에 의하여 도청이 접수됨으로써 광주는 일단 계엄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21일 저녁에 맞은 해방 광주는 피의 값진 승리였다. 이 승리의 환희가 얼마나 아름다운 대동세상으로서의 시민공동체의식을 승화시켰는가는 다음 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여기는 광주, 여기는 금남로. 언어가 필요 없는 세계, 너와 내가 따로 없는 곳. 모든 것을 초월한 순수하고도 뜨거운 사랑만이 샘솟아 넘치고 강 같은 평화만이 넘치는 거리. 너와 나의 가슴과 가슴들이 하나로 모아져 마침내 피로 언약하는 역사의 마당이다. 한번도 이토록 가슴 뭉클하게 사람을 사랑해보지 못한 나는 사랑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가를 광주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저녁노을이 곱게 번지듯이 광주 땅에 번지어 가는 사랑의 절정에 서서, 나는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구나. 광주 시내는 해방되었지만 그 외곽은 계엄군들에 의해 삼엄한 포위망이 형성되었으며, 전남 일원은 곳곳에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5월 22일 12시, 도청 앞에서는 5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궐기대회를 개최하였고, 수습대책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5월 23일에도 역시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여타의 수습대책위원회가 해체되거나 무력화되면서 차츰 광주민중항쟁 지도부가 결성되어가는 과정으로 정리되었다. 5월 24일에도 도청 앞에서 10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으며, 이를 '자유성토 대회'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5월 25일 저녁에는 드디어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가 출현하게 되었으며, 그 명칭을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불렀다. 5월 26일, 계엄군의 진입작전이 시시각각 임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4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대회 후 곧 시가행진이 펼쳐졌다. 그러나 오후로 접어들어 시민군으로 구성된 기동타격대가 조직되었고, 그들은 도청을 사수하기 위해 결사항전을 결의했다. 5월 27일 새벽, 10일간에 걸친 항쟁은 마지막을 기다려야만 했다. 항쟁의 종착점이 된 도청을 사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항쟁의 마지막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윤상원(정외과 출신)은 어린 고등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다른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굳은 각오가 아니면 지금 상황을 헤쳐 나가기가 어렵다. 굳은 각오와 결의가 없는 사람은 지금 나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 그리고 윤상원은 도청에서 스스로 장렬한 죽음을 택하였다. 다음 글은 27일 새벽, 시민군에 의한 결사 항전을 앞둔 도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도청 상황실에서는 자폭하자는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이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의 눈빛이 번뜩였다. 장내는 숙연해졌고,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흐느껴 울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광주 시내 전 지역을 돌며 계엄군의 진입을 알리는 급박한 가두방송이 울렸다. 가두방송에서 울리는 당시 홍보요원이었던 박영순의 처절한 음성은 광주시민들의 가슴을 오래도록 저미게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어쩌면 비굴할 수밖에 없는 무거운 침묵으로 날을 밝혀야 했다. 27일 아침, 시내는 조용했다. 모든 거리가 죽은 듯이 조용했다. 공수부대의 군인들은 도청 앞에서 아침 햇빛도 찬란한 시민군들을 토벌한 승리의 군가를 우렁차게 불러 재꼈다. 이 공수부대 군인들의 참혹한 승리의 그늘에는 말할 수 없는 굴욕과 비참이 핏덩어리보다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광주였고, 용봉골의 전남대학교가 겪어야 했던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침묵이었다. 아마 우리는 그 어느 찬란한 언어로도 그 곡절을 그리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 역사에서 우리는 5·18광주항쟁만큼 절박한 심정에 비견될 수 있는 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의 행적에 대해 알아보자. ‘광주의 아들’로 불리던 그는 총학생회의 다른 간부 2 · 3인과 함께 예비검속을 피해 5월 18일 이후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남긴 좌절만큼이나 큰 고통 속에서 서울의 공장지대를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결국 1982년 4월에 체포되며, 9월 15일의 결심 공판에서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한다. 그날 학생들과 온 시민들이 5·17조치에 항거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싸웠던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나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학생들의 부름을 받은 총학생회장으로서 심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 죽어간 영령들에게, 또 죄 없이 끌려가 고문을 겪은 선배 · 동료 ·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총학생회장으로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역사와 민족 앞에 진실을 말할까 합니다. …… 언젠가 역사는 이 정권을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 시민들이, 아니 항쟁의 거리를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시민들과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구천으로 떠나가 아직도 너무 원통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내 동포, 내 형제들의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분명히 우리는 정확한 심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최후진술이 있고 난 달포 후 10월 12일, 5·18 광주항쟁과 전남대학교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던 박관현은 옥중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단식투쟁 끝에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마침내 죽고 만다. 곧이어 일어난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의 ‘박관현 열사 추도 시위’는 5 . 18 광주항쟁 이후 가장 가열찬 시위로서 전국적으로 번져가는 기폭제가 되었다. 물론 5월 17일 이후, 전남대와 광주항쟁이 짓밟히는 과정에서 5월 이전의 학원자율화 기간에까지 소급하여, 5·18광주항쟁에 따른 실패의 대가를 여지없이 지불해야 했으니, 사망자만 9명이나 되었으며, 학사 징계 및 실형을 받은 학생은 모두 49명이었고, 그와 관련하여 수사를 받거나 실형을 받은 교수들은 21명, 그리고 직원은 2명이었다. 5·18광주항쟁의 좌절과 실패는 그것의 발상지요 중심지인 전남대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광주항쟁 이후 전남대에는 여름 방학을 뺀 79일이라는 가장 긴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그 뜨거운 여름을 때 아닌 겨울잠을 자듯 보내고, 9월 10일에야 개학을 하게 되었다. 박정권은 시위와 관련하여 조기방학 및 휴교령을 남발하곤 하였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의 연장을 위해서는 대학을 폐쇄시키는 것도 불사할 만큼 감시와 탄압을 철저히 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에 대항하여 터진 5·18광주민중항쟁은 휴교와 폐교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성장해야 했던 전남대가 활화산처럼 폭발하여 일어나게 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1980년의 처절하고도 잔인한 여름을 전남대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전남대의 수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은 감옥에 보내지거나 대학으로부터 축출되어야 했으며, 새로 부임한 오항기 총장 역시 비통한 심정으로 ‘우리의 지상과제가 살아남는 일’이라는 의미의 취임사를 남기기도 했다.
'전남대학교 50년사' 중에서